주일설교영상
노창영 목사 -
누가복음의 종려주일
본문 말씀 : 누가복음 18:35-39;19:1-2,11,37-42
제목: 누가복음의 종려주일 본문: 누가복음 18:35-39;19:1-2,11,37-42 설교자: 노창영목사
서론//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기 때문에 종려주일(The Palm Sunday)이라고 합니다. 이 종려주일은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시는 고난주간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축하하는 날(종려주일)에 대하여는 복음서마다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누가복음에 나타난 본문을 중심으로 종려주일의 의미를 상고하겠습니다.
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일부러 여리고를 들르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18:35-39,19:1-2)
A.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항상 모든 일을 행하실 때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모든 동선(動線)은 영혼 구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거라사인의 땅으로 가셨습니다. 그 곳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옷을 벗고 있었고 무덤 사이에 살았습니다. 그는 힘이 세고 난폭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쇠사슬에 묶여 지냈습니다. 그 사람 안에는 군대 귀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으로 그 군대 귀신은 돼지 떼에 들어가 몰사하게 되었고 그 거라사 광인에게서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거라사광인은 옷일 입고, 정신이 온전케 하고,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역을 마치시고 배를 타시고 다시 돌아가셨습니다(눅 8:22-39). 예수님께서는 이 한 사람 때문에 바다를 건너 거라사 땅에 가셨다가 되돌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마음으로 움직이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을 떠나서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들르신 적이 있었습니다(요4장). 사마리아는 앗수르군대의 침공 때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잡혼을 한 후손들이라 순수유대인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여 가지 않으셔도 되었지만 일부러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곳에는 불쌍한 여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고 현재 같이 사는 남자도 그녀의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부정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생명수를 주시려고 수가성까지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구원하셨고 그녀를 통해 수가성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모든 동선은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영혼 구원의 열망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B.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전에 두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18:35-39,19:1-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일부러 여리고를 들르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의 거리는 27km 정도가 되었고, 이는 성인 남성이 약 5~6시간 정도를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해발고도–245m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예루살렘성의 고도는 800~900m 정도 됩니다. 즉 여리고와 예루살렘의 고도차이는 약 1,000m(1km) 정도 됩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고산지대로 올라가는 길이며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바로 입성하지 않으시고 힘들게 여리고로 우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여리고 방문은 두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의도적인 방문(Intentional Visitation)이었습니다. 여리고에는 두 장애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신체 장애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인격 장애인이었습니다.
① 신체 장애인이었던 바디매오입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요 거지입니다. 시각장애인입니다. 그는 늘 앞을 보고 싶은 열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 큰소리로 외쳤고,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머물러 서서 바디매오를 부르셨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눅 18:35-39).
② 인격과 사회관계의 장애인이었던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눅 19:1-2). 그 당시 세리장은 국가공무원이 아니라 로마정부에서 위탁받은 세무업무의 책임자였습니다. 로마 정부는 그들이 지배하는 각 지역마다 사람을 세워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게 했습니다. 삭개오는 이 과정에서 부당이득을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직업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동족에게 죄인으로 취급을 받으며 왕따를 당했습니다. 유대민족은 어떤 민족보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민족을 지배하는 로마 제국에 협조하는 사람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는 키가 작은 콤플렉스가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는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고 부당이득으로 인한 개인적인 양심의 갈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고 삭개오와 그의 집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장애인을 구원하시려는 선교여행의 목적으로 여기고성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에서 비극의 두 장애인을 구원하셨고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여리고를 거쳐 가신 이 동선은 예수님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열망을 보여줍니다. 제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 자취하였던 집주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프레드 파치먼트(Fred Parchment)인데 그때 연세가 76세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수십년 전에 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에 선교여행을 다녀왔고 그 이후는 아무 곳도 여행을 한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선교목적의 여행이 아니면 관광여행을 안간다고 하였습니다. 놀기 위하여 수많은 관광여행을 다니면서도 선교여행은 멀리하는 한국의 성도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선교의 마음으로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Ⅱ.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정확하게 설명하여 주셨습니다(19:11)
A.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의 하나님의 나라 개념
유대민족은 로마 제국 아래에서 식민지로 억눌려 살아 갔습니다. 그들은 배고팠고 인권을 잃어버렸고 독립국의 자존감을 잃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백성들은 이 땅에 메시아 왕국을 건설할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그 지도자가 예수님이시길 바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보고 들으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이 땅에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 지상적, 물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개혁으로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지상적 생각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벳새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셨고 그뿐 아니라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먹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떠나 홀로 산에 들어가 기도하셨습니다(요 6:14-15).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이 땅의 경제적 왕국의 실현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가시는 도중에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가 영광중에 임할 때 우리 둘 중 하나는 주님 보좌우편에 다른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시길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두 제자들의 생각을 쉽게 풀어 말하면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며 고생했으니까 높은 자리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으뜸이 되려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35-40). 이 두 제자는 정치적 권력을 소유하는 왕국을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셨을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망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따르던 베드로는 3년간 기대했던 지상에 건설될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이 무너지자 품안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어 대제사장의 종이었던 말고의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네 검을 집에 꽃아 넣으라, 검을 든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의 지상적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정정해주셨습니다(마 26:51-53). 베드로는 지상적, 현세적, 물리적인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하늘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다시 알려주셨습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개념(19:12-27)
제자들은 예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원했던 현실적, 지상적, 경제적, 정치와 권력적인 왕국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열 므나의 비유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를 가면서 열명의 종들에게 한 므나씩 나눠 주었습니다. 한 므나는 백 데나리온 정도가 됩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주인은 한 사람 당 100일 동안의 품삯에 해당되는 돈을 나눠준 것입니다. 이 후에 왕위를 받고 돌아온 주인에게 한 종이 와서 자신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다고 말하자 주인은 작은 것에 충성했다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다른 종이 와서 자신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겼다고 하자 주인이 그 종도 칭찬을 하였습니다. 또 다른 종이 와서 자신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 두었다고 말하자 주인은 그에게 악한 종이라고 하였고 그의 한 므나를 열 므나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은 원수들을 끌어다 죽이라고 말합니다. 이 열 므나의 비유는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상급과 형벌을 이야기하는 종말론적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지상적,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재림과 심판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입니다. 이 땅의 나라에서 만족을 누리고, 배부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늘의 세계를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장소(Place)입니다. 공간(Space)입니다. 실재(Reality)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요14:1-3).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아버지의 집」,「처소」입니다. 실재적인 장소와 공간의 개념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개념의 기본입니다.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Paradise)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낙원」은 실재적인 공간입니다.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도널드 거스리(Dornald Guthrie)와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밀라드 에릭슨(Millard Erickson)마저도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임재(Presence of God)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폭넓게 하나님의 임재하는 곳이라고 설명합니다. 공간개념을 삭제한 이 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물로 희석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실재적 공간이 아니라면 재림의 준비, 삶의 정결함과 자기 절제, 회개, 철저한 심판의 준비가 사라집니다. 이것은 사단의 장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 므나의 비유처럼 재림, 심판, 상급으로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은 정확합니다. 실재적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나라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정치, 경제, 현실적 나라를 추구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땅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Ⅲ.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종려나무의 환영과 십자가의 눈물의 교차로에 서 계셨습니다(19:37-42)
A. 종려나무의 환영(19:37-40절)
종려나무(Palm Tree)는 열대지역과 아열대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는 대추야자나무라고 하는 식물입니다. 열매의 모양이 대추와 같아서 대추야자나무라고도 부릅니다. 뿌리는 30m까지 뻗어 있고, 최고20-30m까지 성장하는 큰 야자나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 중에 엘림에 갔을 때 70주의 종려나무에서 쉼을 얻었습니다(출15:27). 시편에서는 의인의 번성은 종려나무와 같다고도 말씀합니다(시92:12). 레바논(두로와 시돈)이 주산지인 종려나무는 심기운지 40년이 되었을 때 첫 열매를 맺고, 150에서 200년 동안 열매를 맺습니다. 종려나무가지의 잎은 2~3m 정도가 됩니다. B.C 167년경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리아 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백성들은 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왕이나 장군이 입성할 때 축하의 의미로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었습니다. 또 계시록에 보면 천상예배 속에서 흰옷을 입은 큰 무리가 종려가지를 흔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계7: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라는 큰 기대 속에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즉위하시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종려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이 입성은 호산나 노래하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축제였습니다.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찬송을 드립니다. 이때 백성들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최고조에 달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로 높입니다. 모든 여론이 예수님께 절대적인 지지도를 나타냅니다.
B. 십자가의 눈물(19:41-42)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최고의 찬사로 경배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왕 되심을 기뻐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닷새 뒤에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죽으시게 됩니다. 백성들의 지상적 임금의 기대는 무너집니다. 환영과 축제의 클라이맥스(Climax)는 무너지고, 그들의 소망은 깨어집니다. 닷새 뒤에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이 열렬한 환영 뒤에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셨습니다. 그들을 보시고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들이 개대한 하나님나라의 그림을 모두 깨뜨리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지상의 세계보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의 기대와 소망은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 뒤의 부활과 영생의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맹목적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환영하고 노래하며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어대는 초등학생 신앙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늘의 아버지의 아픔을 읽어야 합니다. 종려나무를 흔들었던 무지한 이 사람들이 닷새 뒤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형벌을 외치는 자들이 됩니다, 이들의 지상적 왕의 기대가 다 깨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환영과 기쁨으로 노래하던 백성들의 초등학생신앙을 무너뜨리고 십자가의 제물로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과 영생의 길을 붙들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이 땅에서의 경제적 풍요와 안락함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언젠가 끝이 납니다. 이들은 평화에 대하여 무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지상왕국이 주는 일시적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들이 갖게 되는 하늘의 평화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평화가 아닌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늘의 평화를 소망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막힌 담이 무너지는 영원한 평화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백성들은 영적인 눈이 감겨서 보지 못하여 초등학생같이 땅의 것만 기대하였습니다.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와 평화를 바라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 종려주일에 무지하게 기쁨의 노래만 부르는 초등학생같은 신앙을 뛰어 넘어, 아버지의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요약: 이이레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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