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영상
노창영 목사 -
거룩한 산 제사와 영적 예배
본문 말씀 : 로마서 12:1-2
주일설교전문
제목: 거룩한 산 제사와 영적 예배
본문: 로마서 12:1-2
2023. 2. 26(주일)
설교자: 노창영 목사
서론// 로마서는 크게 두 파트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먼저, 1장부터 11장까지는 교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자기의 의, 행위, 의지, 노력,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의 선물임에 대하여 그리고 죄를 이기는 성령의 도우심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두 번째 파트인 12장에서 16장까지는 이신칭의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실천과 윤리와 삶의 가치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는 단어는 12:1의 첫 부분에 나오는 「그러므로」라는 네 글자입니다. 「그러므로」는 영어로는 Therefore, 헬라어로는 운(οὖν)입니다.「그러므로」라는 말은 앞 뒤에 있는 내용을 연결하는 인과관계의 접속사입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의 은총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이렇게 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툭히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를 산 제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강해하겠습니다.
Ⅰ. 영적 예배로서의 산 제사에 대하여 상고합시다(12:1)
사도 바울은 구원받고 의로움을 받은 사람들이 가져야 될 삶을 산제사와 영적예배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믿음생활은 영적 예배이고 몸으로 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라는 것입니다. 본문에「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적인 가르침으로 로마에 있는 교인들을 강한어조로 압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비와 긍휼로 믿음의 형제들을 권면하면서 참된 신앙인다운 삶의 모습을 거룩한 제사의 형태로 제시했습니다.
A. 영적 예배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예배와 제사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되어야한다고 먼저 말씀 해주고 있습니다. 영적 예배(Spiritual Worship)는 어떤 특정한 예배 공간이나 장소를 뛰어넘어 넓혀진 형태로 확장된 삶의 예배를 시사하는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광야생활시기와 가나안정착시기에 성막(Tabernacle)을 만들어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정착이 끝나고 나서 열왕시대에 솔로몬왕이 성전을 지었고, 스룹바벨이 포로이후에 다시 재건했고, 예수님당시의 헤롯임금 때에도 성전을 건축을 했습니다. 이 같은 구약에 나오는 성막이나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믿음을 갖고 나아갔고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거기에 임재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시대의 예배는 성전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장소와 공간의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구약의 특정한 장소중심의 성전개념을 예수님께서 깨뜨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4장에서 사마리아여인에게 생명수의 말씀을 이야기하셨고 우리의 예배는 성전이 있는 이 산이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아버지께 예배하는 것임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산은 그리심산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북쪽의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지어놓고 거기서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남쪽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Temple)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의 예배는 모두 장소중심의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예배의 공간개념을 깨뜨리셨습니다. 이 산이나 예루살렘 같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성령님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예배생활의 외연을 확장시켜 가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6:19-20, 3:16-17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몸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우리 몸을 거룩하게 하고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영광의 도구가 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걸어 다니는 성전」(Walking Temple입니다.
B. 영적 예배로서의 거룩한 산 제사
영적 예배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면서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산 제사의 신학은 구약의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1. 구약의 제사는 죽은 제사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물들은 일단 잡아서 번제단 앞에서 죽여 피를 흘리고 그 제물의 육체는 제단에서 다 태웁니다. 모든 동물들은 번제단에서 먼저 죽어야 하나님께서 받아주십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모든 제물들은 살아있는 채로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에 죽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시작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번제단의 죽음을 통해서 사는 역설적 진리가 기독교입니다.
2. 사도 바울은 산 제사를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제물이 아니라 너희 몸 전체를 하나님께 산제사(Living Sacrifice)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은 한 번 제물로 바쳐져 죽는 게 아니라 계속적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도록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고린도전서 15:32에서「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죽는 산 제사의 삶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3:5-10에서「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는 땅에 속한 육신의 지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땅에 속한 육욕(肉慾)들입니다. 그것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우상숭배)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옛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고 새롭게 되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번 죽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죽어 우리의 삶 전체가 24시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초대교회사에 보면 고대교부가운데 존 크리스스토모스(John Crysostomos, C.350-407)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대략 60년을 살았고 안디옥출신의 사람입니다. 나중에 안디옥의 감독이 되었고 후에는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생활합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는 설교자였고, 대단한 달변가였기 때문에 그 이름의 뜻이 크리소스토모스, 즉 황금의 입(Golden Mouth)이었습니다. 정확한 발음, 말씀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 사람들의 영혼에 부딪치는 설교의 능력으로 교회사 2000년역사 가운데 최고의 설교자로 꼽히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 크리소스토모스입니다. 그는 말만 잘하는 립서비스(Lip Service)의 설교자가 아니라 말씀에 임팩트가 있는 권세있는 설교자였고 하나님의 복음을 대적하는 권세자들 앞에서 절대로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왕과 권력자들은 그를 싫어했고 이로 인하여 그는 두 차례나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는 흑해 남쪽에 있는 본도(Pontus) 지역에서 유배중에 죽었고 순교자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는「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한번 죽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더욱 힘든 것은 날마다 살면서 죽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삶의 제사를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크리소스토모스는「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자기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날마다 헌신하는 데 힘을 써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한번 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힘든 것은 순교나 한 번의 죽음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는 삶속에서의 자기 죽음, 자기와의 싸움, 땅에 지체와 육욕을 죽이는 싸움임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생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젊은 날부터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꾸고 기도하면서 신학교를 잘 마쳤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기 위해 파송예배를 받았습니다. 비행기 표까지 다 구입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들어가는 국가에 내전이 벌어져서 선교지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교지는 전쟁상태였고 비행기편도 없었고 들어갈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두 선교사부부는 시댁에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선교사의어머니는 대단히 깐깐한 시어머니였습니다. 며느리였던 선교사는 시댁생활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선교지에 갈 때는「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라고 고백하면서 순교까지 각오하고 큰 헌신으로 가려고 했는데 오히려 이 자매님을 더욱 힘들게 한 사람은 바로 이 시어머니였습니다. 몇 년간의 시댁생활이 다 끝나고 선교지에 들어가면서 이 자매가 고백을 했습니다.「차라리 선교지에서 순교하는 것 보다 더 힘든 것은 시어머님을 모신 지난 몇 년간의 시댁생활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산 제사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영적 예배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Ⅱ. 거룩한 산 제사의 실천에 대하여 상고합시다(12:2)
사도 바울은 영적 예배로서의 거룩한 산 제사의 실천적인 내용을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그것은 본문 12:2에 기록한대로「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A.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
이 세대의 모든 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될 삶의 표준이 아닙니다. 세상속의 어떤 사람도, 어떤 제도도, 어떤 인간의 집단도, 그들의 가치관도, 그들의 삶도 우리의 표준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세대의 어떤 것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인데 이들의 특색을 바울은 에베소서6:1-3에서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이 세상 풍속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삶의 스타일과 그들의 가치관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이 세대의 것들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세상을 본받음이 옳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세상풍속을 따르지 아니하면 시대에 뒤진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두 번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불순종의 아들들 속에서 역사하는 영, 곧 마귀,사단을 따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사단의 노예가 되어 사단을 따라갑니다. 이 사단은 공중 권세를 잡은 자가 되어서 인간들을 휘어 잡습니다. 그리고 인간들 안에 불순종의 영을 심어주어 이를 따르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세 앞에 굴복하지 않고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도전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갑니다. 이는 본능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마음에 끌리는 대로, 느끼는 대로 동물처럼 살아갑니다.
세상 풍속과 마귀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죽은 물고기는 배를 하늘을 향해 하얗게 내놓고 그냥 물을 따라 내려갑니다.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역류하고 거꾸로 올라갑니다. 댐에서 위로 올라가려고 튀고 애를 씁니다.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세대를 따라 흘러갑니다. 이들은 이 세대를 본 받아 그냥 따라 살아갑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오래전에 여행자 한사람이 영국의 유명한 해변을 구경하러 갔는데 이 해변 가에 수백 수천 마리의 갈매기 떼가 죽어 있었고 이로 인하여 엄청난 악취가 풍겨왔습니다. 여러 일꾼들이 갈매기의 시체들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행객은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 봤습니다.「왜 이렇게 갈매기들이 집단으로 죽었습니까?」. 그 일꾼은「여기가 유명한 해변가가 되다 보니 많은 여행객들이 몰려오곤 합니다. 그들이 여기서 사탕이나 과자나 간식을 갈매기들에게 주다 보니 갈매기들이 배가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행객이 다 떠나가면 그들이 주던 간식거리들이 다 사라지고 결국은 굶어 죽게 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행객이「물고기를 잡아 먹으면 되지 왜 굶어 죽습니까?」라고 물으니 그는 「물고기를 잡아먹는 갈매기들이 자연적인 물고기 채취방법을 버리고 사람이 주는 과자와 사탕에 입이 길들여지다 보니까 사냥하는 것을 버렸고 게을러졌고 결국은 굶어 죽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탕을 먹기 전에 밥을 먹어야지 밥을 먹기 전에 사탕을 먼저 먹으면 밥맛이 없습니다. 이미 단것을 먹어서 이미 입맛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커피 먹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커피 마시기 전에 과자나 사과 같은 과일을 먼저 먹으면 커피 맛이 없습니다. 먼저 먹은 과자나 과일이 커피의 고유 맛을 다 없애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의 간식들을 많이 먹다보면 하늘의 신령한 음식을 먹는 미각을 상실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양식, 신령한 물, 신령한 밥을 먹을 때 영적 미각이 살아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가치 기준이 너무 낮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진화론, 무신론, 인본주의, 이기주의, 쾌락주의, 물질주의, 종교다원주의들이 우리의 사고와 가치관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TV, 책, 신문, 휴대폰의 수많은 정보들은 사실상 이 세대의 것들입니다. 그 중에 90%이상이 무가치한 것들이고 쓰레기들입니다. 그것들을 먹고 배를 채우다 보니 우리 갖고 있는 영적 기준이 너무 낮아지게 된 것입니다.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의 삶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영적 기준과 성경적 기준을 세워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B.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말씀에서 마음(Mind)이란 말은 누스(νούς)란 말입니다. 이는 이성, 마음, 생각을 뜻합니다. 영어 성경은「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라고 번역합니다. 마음이 새로워져서 변화되고 달라지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변화가 없으면 산 제사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한번은 어느 교회의 그룹성경공부반에 장로님 한분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는 왼손 가운데 손가락이 없어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다 궁금해 할 때 이 장로님은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목사님과 그룹앞에서 이런 간증을 합니다.「이 손가락이 절단되어 없는 것은 저의 도박중독 때문입니다. 제가 젊은 날에 인생을 잘못 살아서 도박에 중독되어 밥 먹듯이 도박을 하며 살아 왔습니다. 도박 때문에 많은 돈을 잃어버리고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제 아내 마음에 못을 박았습니다. 여러 차례 그만두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제가 밤늦게까지 도박을 하고 아침에 집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도박을 안 하려고 부엌에 들어가 식칼을 뽑아 가운데 손가락을 절단해 버렸습니다. 그게 이 손가락입니다」. 이 장로님의 말씀에 따르면 더욱 가관인 것은 작심삼일이라고 장로님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나서 삼일 뒤에 또 다시 도박장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박중독이 무서운 것입니다. 한번 도박에 빠지면 돌이키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는 손가락을 절단했지만 또 도박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는 인간의 의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이 하루는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는데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에 부딪힘을 주셨고 그의 마음에 회개의 마음이 생겼고 새로운 마음이 생겨 변화가 되어 도박을 끊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죄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장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기독교 강요」 2권에서 인간의 타락한 의지로는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오염되고 타락했습니다. 아무리 선하고 위대한 결단도 우리를 새로운 변화로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실 때만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권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녀는 반듯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새벽기도의 용사였고, 헌금 잘하시고, 교회 생활을 잘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두 가지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남편의 사업형통이요, 둘째는 자녀의 좋은 대학입학입니다. 평범한 기도제목이었고 그 기도제목대로 다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에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아와 고집이 세고 주관이 강하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고 괴로움을 주고 사람들과 불화했습니다. 남편과 불화, 자녀들과 불화, 교회구역원들과 불화로 늘 모든 관계가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자기만 모르고 있었고 스스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이 간질간질하고 갑갑하여 병원에 갔더니 후두암이라는 의사의 판정을 받게 되었고 말을 제대로 못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게 됩니다. 성령님이 감동을 주십니다. 회개하고 마음이 새로워지고 변화가 됩니다. 자기의 교만, 아집, 과거를 하나님께 내어놓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었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고 변화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는 안 됩니다. 성령님께서 은혜로 다가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할 때 변화를 받아 우리의 몸과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제사가 될 수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C.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거룩한 산 제사의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분별이란 말은 헬라어로 도키마제인(δοκιμάζει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에는 테스트(Test)해보다, 시험해보다, 증명해보다, 입증하다, 연구하다, 조사하다, 인정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모든 것들을 무작정 옳다, 틀리다라는 육신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별력을 가지고 범사를 분별할 때 우리는 산 제사의 삶을 사는 실천적인 과제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정확히 분별하고 행동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갈 때 그것이 사망의 길로 우리를 이끌수도 있습니다.
한번은 미국의 어떤 조그만 마을에서 밤중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밤 열두시가 넘었는데 트럭 수십 대가 그 마을에 들어와 빵빵거리고 라이트를 키고 교통경찰이 찾아오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밤중에 다 집 밖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 마을근처를 지나가는 고속도로에 문제가 생겨서 도로공사를 하게 되었는데 고속도로 옆으로 우회하는 도로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우회도로 화살표표지판을 그 동네에 있는 말썽꾸러기들이 반대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회도로로 들어선 수십 대의 트럭이 잘못된 도로표지판을 보고 따라 그 조그만 마을에 들어가 그 마을은 밤중에 아수라장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바른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잘못된 표지판을 따라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온전합니다. 인간들은 아무리 선한 뜻이 있어도 그 안에 불순물, 찌꺼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는 자신의 뜻이 늘 들어가 있습니다. 자기 기쁨, 자기 만족, 자기 즐거움이 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온전하지만 인간의 마음에는 더러운 욕심이 섞여 있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양심입니까? 부모님께 받은 교훈입니까? 선생님의 가르침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계시된 성경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몸을 산 제사를 드리는 영적 예배의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삶의 문제들의 해답은 성경에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성경시대의 발견이 안 된 담배나 마약 같은 것들 있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면 사회 윤리적 가치로 볼 때 술보다 더 나쁜 게 담배입니다. 마약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다 사회적으로 사용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담배와 마약을 취급함에 있어서 성경의 기록은 없으나 성경의 원리를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모든 것들을 모두 다 자세히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는 성경의 원리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10:31에 말씀한대로「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라는 말씀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바른 분별력이 있어야 삶의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산 제사로 자신의 몸을 드리는 영적 예배의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이를 위하여 이 세대를 본 받으시면 안 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으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걸어 다니는 성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정리: 장세훈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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