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영상
노창영 목사 -
나사로의 부활 강해(Ⅳ):무덤,기도,선포,그리고 자유
본문 말씀 : 요한복음 11:38-46
제목: 나사로의 부활 강해(Ⅳ):무덤, 기도, 선포, 그리고 자유 본문: 요한복음 11:38-46 설교자: 노창영목사
서론//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말씀으로 은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나사로의 부활 강해 마지막 네번째 설교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벌어진 사건을 주요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Ⅰ. 먼저, 무덤으로 가신 예수님에 대하여 상고합시다(38-41a)
A. 예수님께서 다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으로 가신 이유(38a)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유대인들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십니다. 통분(痛忿)의 뜻은 ‘아플 통(痛)’자에 ‘분할 분(忿)’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프고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는 에네블리메사토(ἐνεβριμήσατο)입니다. 이 말은 매우 분노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마귀의 권세에 눌려 죄, 죽음, 눈물, 고통아래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시고 분노하셨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통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통분의 마음으로 나사로가 장사된 무덤을 찾아가십니다.
B. 돌로 막힌 무덤에서 벌어진 사건을 봅시다(38b-39a)
1. 이스라엘에 있는 네가지 종류 무덤
이스라엘의 장례 풍습을 살펴보면 네 가지 종류의 무덤이 있습니다.
①먼저, 평토장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 무덤입니다. 평토장은 땅을 파서 시신을 묻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만든 무덤입니다. 그리고 비석을 세워 누군가의 묘지임을 알려줍니다.
②둘째로, 돌무더기입니다. 이 돌무더기는 시신위에 돌을 쌓아올린 무덤입니다. 그리고 비석을 세워 누군가의 묘지임을 알려줍니다.
③셋째로, 방치장입니다. 말 그대로 시신을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주로 죄인이나 전쟁의 포로들에게 행하였던 방식입니다. 시신을 나무 위에 매달아 놓거나, 성의 벽면 위에 걸어 놓습니다. 이는 극악한 죄인을 나무에 매달아 두어 죄를 짓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거나, 적군의 시신을 벽에 걸어 두어 전쟁의 경각심과 승리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였습니다.
④넷째로, 돌무덤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석회암지역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동굴이 많았습니다. 때로는 인위적으로 석회암지역에 있는 산의 벽면을 파서 동굴을 만들어 무덤으로 사용했습니다. 돌무덤은 두 종류의 무덤이 있습니다. 하나는 수직갱도형 돌무덤이며, 다른 하나는 수평갱도형 돌무덤입니다. 수직갱도형 돌무덤은 땅 아래로 파내려가 방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시키는 방식입니다. 수평갱도형 돌무덤은 산의 벽면을 수평으로 파서 무덤을 만들고 방 안에 시신을 안치시키는 방식입니다. 돌무덤은 일인용 무덤도 있었고, 가정용 무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돌무덤은 큰 돌로 입구를 막아 회칠를 하여 이곳이 단순한 동굴이 아니라 무덤임을 알려주었습니다.
2. 돌을 옮겨놓으라고 명령하십니다(39a)
오늘 본문에 나온 나사로의 무덤도 돌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는데, 이때 나사로의 무덤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입구에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Take away the stone)”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기라고 하신 말씀은 나사로를 부활시키기 위한 예수님의 예비신호였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알려주는 전초전이었습니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를 촬영 할 때, 촬영의 신호로 “준비(Ready)”, “시작(action)”을 외칩니다. 촬영의 레디와 액션이라는 말이 촬영이 시작을 알려주듯이, 예수님의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은 나사로의 부활을 알려주는 준비의 신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절망이라는 무덤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생각, 자기 집착, 자기 연민, 자기 합리화, 자기 고집이라는 무덤 속에 갇혀서 나오지 못합니다. 이 절망의 무덤에는 나사로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갇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무덤의 돌을 치워야합니다. 그리해야 절망의 무덤에 빛이 들어가서 우리가 살아 날 수 있습니다.
C. 냄새나는 시신에 대하여 살펴봅시다(39b-41a)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실 때 마르다는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b절)”라고 이야기합니다. 생명체는 씻거나 목욕을 하면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신은 씻겨도 부패하며 악취가 납니다. 생명체는 죽으면 그 것으로 끝이 납니다. 유대지역은 고온다습한 지역입니다. 다른 지역보다 시신의 부패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당일이나 24시간 내에 염습해서 시신을 즉시 무덤으로 옮깁니다. 우리나라는 장례식장마다 시신을 보관하는 냉장실이 있어서, 그 곳에서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보관을 합니다. 그러나 장례식장이 없었던 옛날에는 시신의 냄새를 맡으면서 장례를 진행했습니다. 시신이 썩는 냄새는 매우 지독하고 역겹습니다. 우리나라의 장례식은 일반적으로 3일장입니다. 특별한 경우에는 5일장이나 7일장으로 장례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3일장으로 진행합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장례식에서 주일과 출상일이 겹치는 경우에는 월요일에 출상을 하는 4일장으로 진행됩니다. 주일은 예배드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하여 시신을 씻고, 염습을 하고, 천이나 수의를 입히고, 바로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유가족은 7일 동안 애곡하며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제가 군인교회 목회 당시에 저희 교회에 출석하시는 50대의 여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간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집사님 집에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한 여름에 다른 집사님의 도움을 받아 제가 직접 염을 하는데 시신에서 물이 나오고 시신의 썩는 냄새가 너무나 역겨워서 힘겹게 장례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시신의 섞는 냄새는 끔찍할 만큼 악취를 냅니다. 그런데 시신의 악취보다 더 심한 악취가 있습니다. 바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의 냄새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말과 행동, 그리고 삶 전체에서 악취를 풍깁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그의 입을 통해 더러운 말을 쏟아내며, 각종의 좋지 못한 행동을 합니다. 가정에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 가정이 장례식장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 교회는 장례식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을 받아야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15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날 때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마르다가 오라비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났고 시신에서는 냄새가 납니다라고 말한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입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한 말은 오라비의 생명이 끝났고, 소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마을 입구에서 마르다를 향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라며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마르다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절망의 무덤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자아패쇄, 자기연민, 자기집착의 절망의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치워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영적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져 나가야 합니다.
Ⅱ. 예수님의 기도에 대하여 상고합시다(41-42)
A.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우러러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입구의 돌을 옮기라고 하신 후에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전에 보여주신 기도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한 기도 속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땅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이 땅은 죽음과 눈물과 아픔이 가득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절망과 죽음의 땅을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하여 우러러 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위를 바라보아야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늘을 바라보아야 영성이 열립니다.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아야 거룩한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아야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 자신의 지혜,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니엘 4장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왕궁 지붕위에서 바벨론왕국을 바라보며 이 큰 바벨론의 권세와 영광이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교만하게 말합니다. 그때 하늘에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단4:31)”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후 느부갓네살 왕은 사람에게 쫓겨나 들에 살면서 소처럼 풀을 뜯어 먹으며, 아침 이슬을 맞으며, 머리털이 독수리 털처럼 되고, 손톱은 새 발톱처럼 되는 등 험난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기한이 다 차고 느부갓네살왕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그의 총명이 다시 돌아왔고, 왕으로 복귀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은 하늘을 처다 보아야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지혜가 생기고, 영성이 돌아오고, 신앙이 돌아오며, 인간답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땅만 바라보면 육신에 매여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보신 것처럼 우리도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B.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기도응답을 확신하셨습니다(41-42a)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41절)”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응답을 100% 확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이루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과거형으로 말씀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응답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친밀한 연합을 보여줍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은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하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연합하여 교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100% 일치된 관계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미 이루어졌다는 완벽한 확신속에서 응답됩니다.
삼상 1장에 엘가나의 첫째 부인 한나가 아이을 낳지 못하는 내용이 기록됩니다. 한나는 엘가나의 둘째부인인 브닌나 때문에 마음이 격동하고 번민하여 하나님의 성전에서 통곡하고 눈물 흘립니다. 그때 성전에 있던 제사장 엘리가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1:17)”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나는 임심을 하게 되었고 사무엘을 출산합니다. 엘리가 믿음으로 선포할 때, 한나는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수넴지역에 살고 있는 한 귀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그 지역을 지나 다니는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위하여 자기 집의 옥상에 작은 방을 만들어 침대와 책상과 의자를 두고 아무 때나 쉬어가게 합니다. 이때 엘리사는 하나님의 종을 섬기는 그 주도면밀한 마음을 보고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봅니다. 엘리사는 그녀가 무자한 것을 알고 그녀에게 일년 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엘리사의 선포 후 그 여인은 그 말대로 아들을 출산합니다. 엘리사가 하나님과 친밀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종이었기에 엘리사가 선포할 때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믿음이 좋으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목사님께서 때때로 자녀가 없는 자매를 위하여 선포하면 자녀를 갖게 됩니다. 그 목사님께서 계신 교회의 한 자매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여 임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 자매가 믿음도 좋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자녀가 없는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자매를 향해 ‘아들을 낳으리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자매가 일년 뒤에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하나님과 친밀하셨고 하나님과 소통하였기 때문에 그 뜻대로 믿음의 선포를 하였고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다른 목사님의 일화가 있습니다. 이 목사님의 교회 앞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심겨져 있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몇 년째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답답한 마음에 나무를 향해 “올해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너를 베어 버릴 거야!”라고 한마디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 그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풍성하게 열렸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하면 그 뜻을 알게 되고 선포하면 그대로 됩니다. 나사로의 부활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뜻과 100% 일치하는 연합에서 오는 확신의 선포의 결과였습니다.
C. 기도의 목적(42b)
나사로의 부활을 위하여 드리신 예수님의 기도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임을 알게 하려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2b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시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자임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역사를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Ⅲ.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부활을 선포하셨습니다(43)
A. 위대하신 부활의 대선언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어도 그는 분명히 부활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선 큰 소리로 외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되신 권세와 위엄을 보여주시기 위해 큰 소리로 외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권세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대우주적 선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단순히 나사로를 향한 외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선포하시는 부활의 나팔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Lazarus, come out)”, “나자레 듀로 엑소(Λάζαρε δεῦρο ἔξω)”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에게 더 이상 무덤에 갇혀 있지 말고 나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대우주적 선언입니다. 18세기의 부흥사이며,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죽은 자여, 일어나라!, 더 이상 잠자지 말라, 이 더디고 무딘 인간들이여!(Jesus is risen! He shall the world restore! awake, you dead! dull sinners, sleep no more!)”라고 말했습니다. 사망이 더 이상 나사로를 묶어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선포는 이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분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이름을 빼고 “나오라”고 만 말씀하셨다면, 지구의 모든 시체가 부활하지 않았을까요?라고 농담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만 부르셨기 때문에 나사로만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B. 예수님의 부활 선포는 우리 모두의 부활 승천을 위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나사로만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사로 부활 사건은 앞으로 다가올 큰 부활의 역사를 보여주시기 위한 예고편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단순히 나사로 혼자만의 부활이 아닌, 앞으로 이루어질 우리들의 부활을 보여줍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우리도 부활의 사건에 동참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신학자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로 이끄신 능력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 안에도 함께 역사한다. 부활은 계속되는 사건이다(The same power that brought Christ back from the dead is operative within those who are Christ’s. The Resurrection is an ongoing thing)”라고 말했습니다.
부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현재적 부활(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의 영을 받아 지금 새로운 힘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살아 납니다. 죽은 영혼, 깨어진 영혼, 상한 영혼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 영혼이 소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적 부활입니다. 두 번째로는 몸의 부활(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에 일어날 사건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몸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때에 일어날 아름다운 몸의 부활입니다. 이 몸의 모습은 영적인 몸이며, 변하지 않는 몸이며, 썩지 않는 몸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기억하며 영혼이 소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Ⅳ. 베와 수건에 싸인 나사로의 자유에 대하여 상고합시다(44)
A. 베와 수건에 싸인 나사로의 모습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제일 먼저 시신을 씻습니다. 시신을 소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독을 마치고 나서 시신에 유향을 바르고, 세마포같은 천을 두르거나 수의를 입힙니다. 마지막으로 시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싼 후에 시신을 돌무덤에 가져다 안치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셨을 때, 나사로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부활하여 동굴에서 나올 때의 모습을 보면, 몸은 베로 동여 매인채로, 얼굴은 수건에 싸여진 채로 나옵니다. 이 장면에서 의문이 듭니다. 얼굴이 수건에 싸여지고 몸이 베로 동여 매인채로 나사로는 어떻게 걸어 나올 수 있었을까요? 보통 우리 한국의 장례식의 입관 때에도 시신에 수의를 입힐 때에는 시신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꼭 싸매어 놓습니다. 나사로도 싸매어져 있는데 어떻게 움직여서 걸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움직인 것이라 말합니다. 또 어떤 합리주의적인 신학자는 나사로의 시신에 베를 느슨하게 동여매었기 때문에 쉽게 걸어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나사로가 베로 동인채로 나왔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은 나사로가 꼼짝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나사로 자신의 힘이 아닌 초자연적 능력으로 나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B. 풀어 놓음과 다니는 자유에 대하여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44b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옷과 수건으로 묶인 나사로에게 자유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 사람의 속으로 부활의 영이 들어와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부활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이 부활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더라도 여전히 그를 자유하지 못하게 하는 베옷들이 존재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방해하는 베옷들이 풀어져야 자유하게 되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감싸고 있는 냄새나는 베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우리를 감싸는 베옷과 수건을 벗어 버려야 앞을 보게 되고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세가지의 벗어버릴 베옷이 있습니다. ①먼저 욕심의 베옷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옛 욕심들은 돈, 권력, 명예, 성공에 대한 욕심입니다. ②두 번째는 습관의 베옷이 있습니다. 술, 담배, 마약, 성(性), 인터넷, 스마트폰중독 같은 것입니다. 이 같은 습관으로 인하여 인간은 자유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습관들이 스스로를 가두어 두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은 하지만 습관들에 갇혀 자유하지 못하게 됩니다. ③마지막으로 나쁜 관계의 베옷이 있습니다. 좋지 못한 친구들,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친구들, 인간적 즐거움만 주는 친구들, 악하게 만드는 친구들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악한 욕심, 옛 습관을 버리고, 나쁜 친구들과의 관계를 끊어야합니다. 에베소서4:22-24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자유하지 못하게 만드는 베옷을 벗어 던져 버려야 합니다. 얼굴에 싸인 수건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해져야만 부활의 참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자유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부활은 자유의 선언입니다. 우리가 자유하지 못한 것은, 우리 속의 욕심과 나쁜 습관과 불우한관계로 무너진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묶고 있는 수건과 베옷을 과감히 벗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결론// 우리는 절망의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악취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활과 영생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옛수건과 베옷을 던져 버리고 자유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의 은혜와 부활의 영성과 부활의 축복이 모든 성도님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요약: 홍준기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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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 | 사십주강해(Vll):십계명(4):제7·8계명 | 2025-02-23 | 출애굽기 20:14-15 | 노창영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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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
655 | 사십주강해(Vl):십계명(3):제5·6계명 | 2025-02-16 | 출애굽기 20:12-13 | 노창영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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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
654 | 사십주강해(V):십계명(2):제3·4계명 | 2025-02-09 | 출애굽기 20:7-11 | 노창영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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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
653 | 사십주강해(Ⅳ):십계명(1):제1·2계명 | 2025-02-02 | 출애굽기 20:1-6 | 노창영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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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
652 | 사십주강해(Ⅲ):사도신경(3)-죄용서·몸의 부활·영생 | 2025-01-26 | 요한일서 1:9,로마서 6:6, 고린도전서 15:44,요한복음 5:24 | 노창영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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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 | 사십주강해(Ⅱ):사도신경(2)-성령님·교회·교제 | 2025-01-19 | 고린도후서 13:13,요한복음 14:26,고린도전서 1:2, 에베소서 4:2-3,12 | 노창영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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